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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이 일었다. 보리스는 제 팔을 타고 내리는 듯이 매끄러운 예복의 소매를 정리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두루마리의 어지러운 글자들 사이로 그 날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당신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고,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눈에 뒤섞여 재가 비처럼 내렸다. 어딘가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리목 바로 옆을 스치던 사내가 응준궁이 타고 있는 소리랬다. 보리스는 시꺼먼 밤하늘 위로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과 널따란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고 노을이 타고 있다 하더라도 믿을 만한 모양새였다고, 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해냈다.

   분란이 일기 바로 몇 시진 전에 형이 죽었다. 다정다감한 미소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기 전에 둥그런 과실에서 태어났던 그는 다시 나무뿌리로 돌아갔다. 보리스는 리목 앞에서 스러진 당신의 몸을 떠날 수 없었다. 부모 잃고 저를 단신의 몸으로 눈보라 속에서 지켜온 사람이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예프넨의 손가락을 쥔 보리스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 다음 날 아침, 리목이 혹 타지는 않았나 하여 찾아온 혜주후 겟케이의 수족들에게 도움을 받아 예프넨을 땅에 묻었다. 하늘의 바다, 그 위도, 그 아래도 함성이 높다랗게 솟아올랐던 전날의 밤이 거짓 같았다. 남은 것이라곤 덜렁거리는 왕의 목과 기린의 목이었다. 보리스는 예프넨의 몸이 흙과 눈에 섞여 사라지는 동안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라가 기울었다. 천명이 기운 것만 같았다. 당신의 목숨도, 그를 따라 기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여전히 길바닥을 전전하던 보리스가 다시 찾은 자리는 포소에 꼿꼿이 서있던 리목의 앞이었다. 나라의 외곽에서 출몰하던 요마는 점점 이불에 좀이 먹듯 수도를 향해 발톱을 세웠다. 포소는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돌바닥은 여기저기 성한 곳 없이 깨지거나 금이 가 있었고, 그나마도 눈이 사이사이 끼어들어 그 틈새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왕은 여전히 자리에 없다고 했다. 기린이 태어났는지조차 난민의 입장인 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보리스는 그저 품에 안은 검을 다잡고 리목 아래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돈은 없었다. 성벽 근처로 가면 먹을 것이나, 잘 곳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워낙 오랜 시간 방치된 지라 그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보리스는 하늘에 피어났던 불꽃만큼이나 눈보라 속에서 일렁거리던 푸른 달을 기억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여름에는 나라를 돌며 요마를 베고 겨울에는 리목 아래서 잠을 청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던 눈발은 예프넨의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 끝을 떠올리게 했고, 그 뒤로 까맣게 가라앉은 하늘은 분란이 일던 그 때와 같았다. 검게 물든 하늘에 일렁임이 있었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마음 끝자락에 치밀어 오르는 동안, 푸른 달이 떴다. 퍽 둥근 모양새였지만 흐릿한 시야가 진해지고 나서는 그게 길게 자란 갈기라는 것을 알았다. 검을 품에 안은 채, 사취를 풍기며 몸을 말고 있던 제 앞으로 ‘그 것’은 내려앉았다. 얼핏 보면 하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시린 몸은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아름다움이어서, 그 것의 머리를 보며 기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무것도.”

 

기린은 무릎을 꿇었다. 다리의 관절이 내려앉는 것을 보니 꿇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곧게 뻗은 뿔이 낡은 천으로 꽁꽁 싸맨 보리스의 발등에 닿았다.

 

  “천명으로 주상을 맞이합니다.”

 

보리스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설명할 길은 없었다. 푸르게 빛나는 갈기도, 그 위로 마치 기린의 등을 피해 흩날리는 눈발도, 등 뒤로 은은하게 온기를 전해오는 리목도.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소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 드립니다.”

  “……허락한다.”

 

꿈이라면 이걸로 족했다. 지금 생각하자면 좀 더 신중해도 좋았을 일이었다. 물론 몇 번을 생각하고 몇 날 며칠에 걸쳐 답을 미뤘다 하더라도 분명 저는 또 왕의 자리에 앉아있었겠지만은. 그 날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기린의 뿔끝이 빛난다고 생각할 즈음 보리스는 잠에 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와 오랜 시간 걸어 쌓인 피로는 아무리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나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었기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남루한 응준궁의 침실이었다.

 

   보리스는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눈가를 문질렀다.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많은 양의 글자를 제 눈과 머리에 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여전히 혜주후의 자리에 앉아있는 겟케이의 도움을 받아 나라의 상황을 보는 것만 해도 어깨에 담이 올 것 같았다. 그나마 쌓인 체력과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호우키는?”

 

보리스의 발밑 그림자가 울렁거렸다.

 

[곧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리목에게 목소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보리스는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그림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겟케이는 생각보다 쉬이 물러났다. 방극국의 상태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이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오랜 시간 암군의 시대를 거쳐 왔기 때문에 휘하의 사람들도, 심지어 방극국의 국민마저도 왕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최근 왕과 기린은 인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숙한 저들을 보필할 수 있는 듬직한 이들이 필요함이었다. 하지만 워낙 살아온 삶이 다르고, 보는 시선이 다르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보리스는 호우키, 방극국의 청기린인 그와 의견을 대립하게 되었다. 주변인들에겐 현을 둘러보고 온다고 하였겠지만 보리스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겠지.”

[예?]

“아니야. 그럼 마중이라도 나가볼까.”

 

보리스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감아 두루마리의 산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옷의 소매를 다른 손으로 쥐어 정리하며 짧게 말을 덧붙였다. 김에 옷도 좀 갈아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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